일본은행의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으로 나타난 엔저(엔화가치 약세)로 엔화 구매력이 변동환율제 도입 이후 최저로 내려갔다. 이 같은 현상은 식품 등 수입품 가격을 높여 가계에 부담이 되지만 방일 외국인 소비나 일본 수출기업 실적 확대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연초 달러당 127엔대였던 엔화 가치는 지난 23일 7개월여 만에 최저치인 143엔대로 내려갔고 지난해 일본정부와 일본은행이 '달러 매도-엔화매입' 등 시장 개입에 나섰을 때 기록한 145엔대도 눈앞에 두고 있다는 예측이 나온다.
25일 니혼게이자이신문과 국제결제은행에 따르면 지난 5월 엔화의 실질실효환율은 76.2(2020=100)로 전달보다 2%가량 하락했다. 일본은행 추산으로 이같은 수치는 일본이 변동환율제를 이행한 1973년 이후 가장 낮다. 실질실효환율은 여러 통화에 대한 종합적 구매력을 보여주는 지표로 활용된다.
작년 초 달러당 115엔이던 엔화 가치는 작년 10월 32년 만에 최저치인 151엔대까지 내려갔다. 올 초에는 127엔대를 기록하기도 했으나 지난 3월께 본격 내림세를 보이며 23일 뉴욕외환시장에서 143.87엔으로 약 7개월 만에 최저치를 찍었다.
일본 언론에서는 달러당 145엔대가 가시권에 있다는 전망이 이어진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연말 달러 대비 엔화값 전망치를 140엔에서 145엔으로 하향 조정했다. 연내 147엔까지 하락할 수도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엔저가 지속되는 원인은 일본은행의 대규모 금융완화와 이에 따른 미일 간 금리 차이 등이다. 작년 3월부터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공격적으로 기준금리를 인상하던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이달 금리를 동결했다. 하지만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올해 두 차례 정도 금리를 더 올리는게 적절하다고 밝혔다. 10여 년간 금융완화 정책을 펼치며 아베노믹스를 뒷받침해오던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가 퇴임하고 지난 4월 우에다 가즈오 총재가 새로 취임했지만 그 역시 금융완화 지속에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해 호주 커먼웰스은행(CBA)의 크리스티나 클리프턴 이코노미스는 "일본과 주요국 중앙은행간 극명한 대조는 엔화값이 더 내려갈 것임을 시사한다"며 "엔화 약세는 일본 당국의 구두 개입을 촉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엔저는 수입 식품 가격 상승 등을 통해 가계와 수입 기업 등에 부담을 주고 있다. 전국 슈퍼마켓 판매 정보를 종합한 결과 유럽산 치즈 중 팔리는 제품 가격이 1년 새 11%, 건조 파스타는 23% 올랐다. 유럽산 와인을 취급하는 일본 와인전문점에 따르면 이 가게에서 판매하는 와인 1병당 가격도 15~20% 상승했다. 식품 외에 고급 공산품도 가격 인상폭이 두드러진다. 예컨대 스위스산 고급 시계 '오메가'의 인기 모델 중에는 매장 가격이 1년 전보다 40% 가까이 오른 제품도 있다. 이 같은 유럽산 수입 제품 가격 상승에는 환율로 인한 엔화 구매력 저하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일본 5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2%(전년 동기 대비)로 전달보다 오름폭이 0.2%포인트 줄었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일반적으로 엔저는 일본 수출기업실적과 외국인 관광객 소비 확대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평가된다. 다이와증권은 엔화 가치가 달러당 1엔 내려가면 일본 기업의 경상이익이 0.4%가량 증가한다고 추산했다. 올해 5월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은 189만8900명으로 1년 전의 12.9배로 늘었다. 지난 해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원유 자원 가격이 고공행진하며 엔저의 긍정적 효과보다 물가 상승 등으로 미치는 부정적 효과가 크다는 '나쁜 엔저' 논란이 적지 않았다. 일본 금융분석기관 토탄리서치에 따르면 인구 100만명 이상 선진국 중 일본은 지난 10년간 실질실효환율 하락률이 가장 큰 데 반해, 실질 경제성장률은 뒤에서 두 번째로 낮았다. 하지만 올해는 작년에 비해 원유 자원 가격이 상대적으로 안정세를 보이며 나쁜 엔저 지적이 크게 부각되지 않고 있다고 산케이신문은 지적했다.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은 지난해 9~10월 엔저가 심화되자 약 9조엔을 투입해 달러를 매도하고 엔화를 매입하는 시장 개입에 나선 바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장 상황이 달라진 만큼 작년처럼 145엔대에서는 시장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다이와증권 관계자는 "달러당 150엔을 넘을 때까지 시장 개입이 진행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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